小石 2006. 7. 16. 16:42













(이십수하삼십객)
(사십촌중오십식)
(인난기유칠십사)
(불여귀가삼십식)

이“시”가 그 유명한 김삿갓의
이십수하라는 “시”다

『스무나무 아래 낯 설은 나그네가
망할(마흔) 마을에서 쉰밥을 먹게 되었더라,
인간으로서 어찌 일흔(이런) 일이 있으리요,
고향 집에 돌아가 설흔 밥 먹느니만
같지 못하겠구나.....』

난고(蘭皐) 김삿갓

선생은 안동김씨의 시조인 고려 개국공신
선평의 후예로 조부는 선천부사 익순이고
부 안근과 모 함평이씨 사이의 이남이다.

순조 7년 정묘(1807년) 3월 3일
경기도 양주군 회천면 회암리에서 출생하였고
휘(諱)는 병연 자는 성심 호는 난고(蘭皐)이다.

순조 12년 임신(1812)선생 육세 때
조부 익순이 홍경래 란에 관련되어
3월 9일 복주(覆誅)되자 연루(連累)를 피하여
황해도 곡산에서 숨어 자랐다.
(익순은 고종 정유년에 신원(伸寃)되고
순종 무신에 복작(復爵)되다)

그 후 조부 익순에 대한 문죄는
본인에 국한하기로 한 조정 결정이 알려져서
선생은 모친과 함께 곡산을 떠나
광주, 이천, 가평을 전전하다가
평창을 거쳐 영월 삼옥에 정착하였다.

조부의 행적을 모르고 자랐던 선생은
20세때 영월도호부 동헌 백일장에서
조부를 지탄한 죄책으로 번민 끝에
궁벽(窮僻)한 산협(山峽)인 어둔으로 이주하였다.

선생은 자책과 통한을 이기지 못하여 22세에
삿갓을 쓰고 방랑길에 나섰으며
김삿갓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선생은 57세로 운명할 때까지
전국을 두루 유랑하였으며 인간사
모든 것을 시제로 락운성시(落韻成詩)하였다.

또한 선생의 과시는 후세 과거 지망자들의
교범으로 쓰여 졌을 뿐더러
특히 평민들의 생활상을 시로 읊어
빛나는 서민문학을 남기었다.

철종 14년 계해(1863) 3월 29일
전라도 화순 동복에서
풍운 속에 청운의 푸른 꿈을 접고
해학과 재치와 풍류로 한 세상을 살아온
조선 후기 방랑시인이자
천재시인인 김삿갓의
한 많은 생을 마감함...

3년 후 둘째 아들 익균이 현재의
하동면 와석리 노루목 으로
묘소를 이장하였다.


      - 소석 -